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최근에 로완 윌리엄스를 소개하는 자료가 국내에도 많아지기 시작했다. 존 스토트나 톰 라이트가 복음주의 성공회 진영을 대표하는 진영이라면, 로완 윌리엄스는 성공회 고교회파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한국 교회가 처한 현실이 오버랩되면서 그의 강의와 메시지가 점차 더 주목 받을 것이라 생각한다.
로완 윌리엄스는 성공회 신학자이자 켄터베리 대주교를 역임한 사제이다. 간혹 성공회 켄터베리 대주교를 로마카톨릭의 교황과 비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성공회 사제직에 대한 그릇된 이해일 뿐이다. 그를 소개하는 몇 안되는 책들을 읽어보면 굉장히 평범한 언어로 기술하지만 페이지를 쉽게 넘기기 어려울만큼의 묵직함이 존재한다. 한 마디로 얘기하면 그냥 버릴 말이 없다. 글에 군더더기가 전혀 없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는 것” 이 얇은 책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네 가지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루는 핵심 요소인 세례, 성경, 성찬례, 기도를 통해, 우리가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독립적인 존재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공동체 몸 안에 있음을 일깨워 준다. 매우 기본적이고 당연한 기본 행위이지만 실상 이 네 가지 요소야말로 Being Christian을 가능하게 하는 하느님의 선물이며, 그 안에는 하느님의 심오한 신비와 질서가 담겨있다.

세례

솔직히 세례를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 이상으로 생각해보진 않았다. 현대 개신교가 범하고 있는 가장 큰 실수는 역설적으로 신자라는 증표 자체를 위해, 즉 세례 형식 자체를 위해 그 과정과 신앙의 문답들을 간과하는 현실인 듯 싶다. 특히 나처럼 유아세례를 받은 신자들은 입교라는 더 간소화된 절차를 통해 단순히 신앙을(그냥 교리의 인지여부를) 재확인하는 수준에 머무른다. 하지만 세례 받는 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게다가 어떤 특별한 지위나 신분이 부과된 것을 말하지 않는다. 본래 세례는 그런 것이 아니라, 어떤 안전한 장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빈곤과 타락과 혼란으로 가득한 세상 한가운데 사는 삶을 기꺼이 끌어안는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한다.(p28) 하지만 신앙의 신비도 늘 역설적이듯이 이 길은 위험하면서도 신자인 우리에게 생명을 내어주는 길이다. 그 길은 우리처럼 그 곳으로 초청 받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함께, 다른 사람의 기도와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으며 우리도 다른사람에게 필요한 기도와 사랑을 나누어주는 길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예언자이자 제사장과 왕으로서의 정체성을 구현하도록 하느님께 기름 부음받은 분이다.(p35) 때문에 세례받은 우리는 예언과 제사장직과 왕권의 삶을 살게 된다. 예언자는 공동체가 부름받은 본래의 모습이 되도록 늘 도전하는 임무를 맡은 자다. 세례받은 사람은 이 예언자적 직무를 본받아 비판적이며 의문을 제기하는 데 주저해서 안된다. 교회 안에서 우리가 여기에 존재하는 목적을 ‘서로에게’ 상기시키고, ‘서로를 향해’ 예언자가 되는 것이다. 로완 윌리엄스는 우리가 끊임없이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여기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선물을 잊었습니까?’ 라고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정말 그러하다. 가끔 교회가 취미써클인지 관료조직인 헷갈릴 때가 있다!) 교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우리가 속한 인간 환경 전체에 대해서도 물어야 한다. ‘그 일은 무엇을 위한것인가? 왜 우리가 당연히 여겨야 하는가? 그것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 가는가?’ 또 다른 측면인 제사장은 하느님과 인간의 무너진 관계를 연결하는 사람이며 세례를 받아 예수의 제사장직에 참여하는 자에겐 하느님과 세상의 깨진 관계를 치유하는 소명이 있다.(p39) 분열되고 상처입고 무질서한 상황들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통해 무너진 현실을 회복시킨다. 성찬례 가운데 실재하시는 예수님은 만물을 회복하신 예수님의 현존이다. 마지막으로 왕의 소명은 사회의 법과 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세례받는 삶은 하느님의 정의에 맞추어 삶과 인간 환경을 가꾸는 일에 기꺼이 참여하고 나아가 세상에 참여하며 하느님의 지혜와 질서와 정의가 반영된 곳으로 만드는 삶이다.(p40) 이 세가지 요소는 각각 나머지 요소를 필요로 하며, 결코 별개로 분리된 소명들이 아니고 동일한 삶의 세가지 측면이다.

성경

로완 윌리엄스는 성경이 ‘읽는’ 책이라기 보다는 오랜시간동안 공중예배에서 세례받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듣는’ 책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그리스도인의 삶은 귀 기울여 듣는 삶임을 강조한다.(p47). 또한 성경은 해석공동체인 교회에 주어진 말씀으로써 본질적으로 함께 읽는 것이다. 이는 흔히 개신교에서 일반적으로 방에 홀로 앉아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성경 읽기 방식과는 차이가 있다. 특히 로완 윌리엄스가 속한 성공회는, 성경을 신뢰한다고 할 때 그 의미가 성경에 대한 문자적, 역사적, 과학적 신뢰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저자를 택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신뢰, 성경 저자에 대한 신뢰, 성경이 선포되고 계승되는 교회와 그 전통에 대한 신뢰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예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는 그저 율법 만을 전달하는게 아니라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시공간 안에 우리를 위치시키고, 그 안에서 사건들을 관찰하며 다양한 인물들을 만나고 그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는지 찾으려고 애쓴다. ‘이 이야기에서 나는 누구인가’. 예컨대 불의한 재판관의 이야기를 들려주실 때는, 우리가 그런 일을 해도 좋다고 말씀하시는게 아니라, 각자가 하느님과의 관계에 비추어 자신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의도하는 것이다. 특히 단순히 성경 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옳다고 여기는 태도는 잘못된 것이다. 대부분 축자영감설의 산물이기도 한데, 이런 사고는 폭력, 노예제도, 여성 억압의 편견으로 정당화되는 비극의 시작이다. (p56)

성찬례

예수께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과 음식을 나누시며 떡과 포도주를 가르켜 장차 십자가에서 찢기고 쏟게 될 자기의 몸과 피라고 말씀하실 때, 로완 윌리엄스는 주께서 감당해야 할 고난과 죽음이 하느님의 환영과 자비를 나타내는 표징이었다고 설명한다.(p80) 때문에 예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기 전에, 자신의 죽음이 희망을 여는 문이 될 것임을 하느님께 감사하며 자신의 경험을 하느님의 현실과 연결한다. 우리 역시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 어떤 것이든, 하느님의 선물에서 비롯된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감사란 우리의 경험을 하느님께 연결하는 것이며 이는 성찬례 전반을 통해서도 마찬가지다. 주님의 현존 안에서 떡과 포도주를 놓고 감사기도를 드리는 것은 세상과 하느님을 연결하고 인간의 경험과 거룩하신 하느님을 연결한다.(p82). 이런 성찬례에서 이뤄지는 일을 받아들이는 것은 모든 경험과 상황 속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다는 물적 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이자 비가시적인 하느님의 은총을 인식하는 것이고 만물을 성례전적으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양한 신앙적 스펙트럼을 갖는 성공회 신자들 중에는 떡과 포도주를 공경하는 태도가 극진한 신자들이 있는데어떻게 보면 하느님께서 지으신 모든 물질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여기는 태도와 같은 맥락이 아닐까 생각한다. 동시에 우리는 성찬례 안에서 이루어지는 변혁이 ‘성령’의 활동이라는 점을 믿고 인정한다. 성체 제정을 하며 드리는 기도는 떡과 포도주가 기적적으로 변화되기를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모두를 기적적으로 변화시켜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하느님을 찬양하며 그 영광을 위해 살게 되기를 구하는 것이다.(p91)

기도

로완 윌리엄스가 말하는 기도는 참된 인간됨을 향해 자라나기 위한 귀한 도구이다. 기도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예수께서 하시는 일이다. 주기도문에 우리아버지라고 표현하신 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우리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그리스도의 기도가 우리 안에 일어나게 한다면 우리의 이기적인 생각과 이상과 희망은 점차 그 분의 영원한 사역에 일치될 것이다.(p99) 그래서 세상에서 의롭게 사는 일은 기도와 무관하지 않다. 이웃을 용서하고 재산을 나누어주는 것은 기적을 행하는 것과 같으며, 이런 일을 행하는 것은 하느님의 권세가 역사하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