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즈업에 대한 단상

이번 포스팅은 최근 경험한 일련의 사건들이 계기가 되었다.

내 삶을 돌아보면 나의 신앙과 음악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찬양을 좋아해서 어렸을 때 성가대와 작은불꽃중창단이라는 활동을 했고, 예수마을 음악활동을 했던 광철이형을 따라가 어린이 CCM음반도 냈던 기억이 난다. 청소년시절엔 화요모임을 다니기 시작했고 대학에서 본격적으로 YWAM에 들어가 캠퍼스와 단기선교지에서 찬양사역을 했다. YWAM의 최고 전성기(?)였던 이 시기는 캠퍼스워십 앨범이 한창 유행하던 시기였는데, 캠퍼스워십 3집 이후의 모든 앨범에는 회중으로써의 내 목소리가 실려 있을 정도로 정말 열심히 예배를 드리며 다녔다. #

이랬던 내가 찬양 때문에 신앙의 회의에 빠졌다는 사실은 참 아이러니하다. 지금의 교회가 음악에 대한 과도한 치중으로 인해 교회의 본질, 나아가서 기독교의 본질 자체가 위기에 처해 있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어떻게 보면 내 신앙의 형성과정에 있어 하나님과의 관계의 시작이 이렇게 감정적이고 관념적으로 시작된 데에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이 든다.

내가 이야기 하려는 것은 CCM이 갖는 신학적 근거나 그 의미를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성령운동이나 빈야드운동에 대해 논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며 그럴만한 지식도 내겐 없다. 나는 오늘날 자신들의 진액을 쏟아가며 찬양 사역에 힘을 쏟는 많은 형제자매의 열정과 그들이 가진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선의가 반드시 좋은 결과를 보장하지 않듯이, 우리가 옳다고 믿는 그 어떠한 방법들도 끊임없이 돌아보고 점검할 필요가 있으며 찬양이 차지하는 우리 신앙의 비중을 생각할 때 더욱 그렇다. 중요할수록 무조건 믿는다는 것은 옳지 않다. 중요할수록 더 의심하고 확인한다. 아니 그래야 한다.

스타를 만드는 찬양집회

어떤 찬양이 신자의 삶 속에 내면화되면 그 곡은 단순한 찬양 그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된다. 가사 하나하나에 신앙고백과 결단이 녹아 있고 하나님과의 강렬했던 만남이 담겨 있다.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찬양사역자였던 최덕신의 불륜과 몰락은 나에게 전병욱 사건 그 이상의 충격을 주었다. 나 가진재물 없으나라는 찬양과 함께 했던 나의 신앙고백이 성매매중독자가 만든 노래에 기반했다는 사실에 배신감과 신앙적 회의가 밀려왔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더 이상 체험적 신앙에 의존하지 않도록 일깨워 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 이후로 YWAM에서 들었던 몇몇 찬양인도자들에 대한 뒷얘기, Healer라는 아름다운 찬양을 만든 힐송(Hillsong)의 마이클 구글리엘무치(Michael Guglielmucc) 목사의 사기행각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난 뒤에는, 찬양인도를 잘한다는 것과 그 사람의 신앙과는 아무런 상관 관계가 없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이들이 원래 그랬던 사람들이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화요모임이나 캠퍼스워십같은 워십리더 중심의 찬양집회가 대중화되면서 어느샌가 ‘기름부음’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점점 그 찬양인도자의 기름부음을 측정했던 것 같다. 찬양인도자가 얼마나 기름부음 받은자인가에 따라 예배때 부어지는 은혜의 질과 양이 결정된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좋든 싫든 화려함에 열광하는 찬양집회 형태의 예배는 이러한 시선으로 예배를 바라보고 판단하게 만들었다. 아마 찬양인도를 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는 곧 찬양인도자가 이 예배의 성패여부가 본인에게 달려있다는 착각을 하게 만들고, 본인이 영적 전쟁의 선봉에 서서 회중을 이끌어야 한다는 오류를 범하게 만든다. 이 경우 은혜의 원천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이 ‘은혜’가 맞을까. 이런식으로 찬양인도자나 예배의 리더가 어떤 권위를 갖게 되면 그 지도자에게 복종하는 환경이 조성되기 마련이다. 특히나 찬양집회처럼 감정의 향연이 펼쳐지는 환경에서는 맹목적 복종을 강요하기가 더욱 쉽다. 혹은 이러한 충성이 너무 견고하다보니 라이즈업의 이동현처럼 이를 이용해서 자신의 욕망을 풀어내려는 리더가 나오기도 한다. 꼭 찬양인도자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니지만 교회의 지도자들의 일탈이 쉽게 일어나는 구조적인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음악으로 자란 신앙의 수준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만났는가는 그 사람의 향후 신앙생활의 모습을 결정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나의 지인 중 한 분은 군대에서 찬양 중에 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강렬히 기억하며 지금도 계속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구할뿐 아니라 후배들에게도 그것을 가르치고 권면한다. 자신이 찬양으로 시작해 찬양으로 살아왔으니 다른 것을 가르칠 수가 없다. 이 길 속에 성령의 임재가 있음을 확신하며 기타와 드럼을 울려대는 사람을 많이 보았다. 그렇다면 그 감동과 떨림이 진짜 성령의 임재일까. 이렇게 성령님을 만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을까. 예배의 현장은 예배당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현란한 사운드와 리듬으로 회중을 압도한다. 예배는 계획된 ‘콘티’에 의해 움직이고 인도자의 리듬에 맞추어 강약 조절, 기쁨과 애통함이 교차한다. 감정이 고조되면 실존의 삶을 뛰어넘는 헌신의 고백이 나오고 성욕도 제어되며 세상과의 싸움에서 완전히 승리할 수 있게 된다. 뜨겁게 찬양하고 스트레스를 발산한 뒤 돌아온 일상을 보자. 무엇이 남았을까. 진정으로 승리한 삶이 남았을까. 지금의 예배 모습은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나라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고민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사유할거리를 던지지 않는다. 찬양집회에 운집한 수많은 회중들이 눈물흘리는 모습으로 성령의 감동이 임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을까. 이단 집회에도 수많은 사람이 은혜를 받은 듯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 마련이다. CCM이 주는 흥분을 은혜라고 말하는 것, 내가 만족해야 은혜가 있다고 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어린 청소년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잘못된 은혜관, 구원관을 심어줄 뿐더러, 가짜 회심자를 양성하고 그것이 곧 그의 전체 인생에서 신앙의 회의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이다. 성경은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반드시 말씀으로 자라야함을 명확히 하고 있다. 갓난 아기라면 젖에 대한 사모함이 생기기 마련이다. 아니, 과자를 찾더라도 젖을 물려야 하는 것이 부모의 책임이다. 오늘날의 한국 교회 주일학교, 청년사역을 돌아보면, 기타와 드럼 빼고 무엇이 남았나. 설교도 듣고 셀모임도 한다지만 언제나 선택사항이다. 피아노 학원 10년을 다니면 피아노를 잘 치고, 수학 학원 10년을 다니면 수학을 어느정도 아는게 정상인데, 교회를 10년 20년 다닌 학생들이 성경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다. 찬양집회에 거의 모든 것을 의존하는 수련회. 모든 열정을 찬양에 쏟아 붓고 말씀시간에 부족한 잠을 보충하는 모습이 오늘날 교회가 치중하고 있는 모습이 어떤 것인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게토화

소위 셀레브레이션이라고 하는, 최근에 다녀온 중등부 수련회의 집회 영상이 페북에 공유되었고, 우리 아이들의 열광하는 반응을 보았을때 여러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쳐갔다. 일단 교회를 다니지 않는 친구들이 그 장면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하는 내 특유의 부질없는 걱정이 앞섰다.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게토화된 언어와 감수성도 걱정이지만, 게토화된 언어대로 살지 못하는 그 일상의 모습들은 어떨까. 설령 화려한 밴드와 노래 소리에 이끌려 믿지 않은 청소년들이 교회에 나온다 한들, 이들이 계속해서 교회에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찬양집회가 아닌 다른 예배가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유희열의 스케치북인줄 알고 나왔는데 매주일 가요무대를 한다면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할까. 진리에 대한 진지한 태도로 나온 사람에게도 그들만의 리그는 낯설다. 누군가 잔뜩 인상을 찌푸린채 두 손을 두고 고함을 지를 때,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교회를 떠나고 있을 것이다. 단지 그들을 향한 우리의 관심이 없었을 뿐.

이상의 내 잡설의 진위여부와 무관하게, 객관적인 정황만 놓고 보더라도 그간의 찬양 위주 청소년, 청년 사역이 의미있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고 보긴 어렵다. 기성 교회가 강조하던 숫자는 오히려 늘지도 않았고, 주일학교는 점점 쇠락하고 있다. 새로운 예배 문화는 정착했지만 현대예배와 전통예배의 조화라는 또 하나의 숙제만 남겼다. 나의 신앙적 회의는 믿음의 근거가 되어야 할 말씀에 깊이 뿌리박는 대신 내 감정 상태에 나의 신앙을 뿌리박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올 수밖에 없었던 결과였다. 물론 이런 찬양에 대한 내 생각과 태도가 시간이 지날수록 변하였듯이 지금 이런 생각들도 언젠가 변할지 모르겠다. 예배를 좀 더 전문적으로 연구하시는 분들이나 실제 현장에서 사역하는 분들이 체감하는 것은 좀 더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지속되는 한 곧 마주하게 될 것이라 본다. 결국은 변하지 않는 교회를 뛰쳐나오거나 콘서트 가운데 느끼는 감정을 믿음으로 착각하고 살게 되는 결과를.